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리역 폭발 사고 (문단 편집) == 사건의 여파 == [[파일:external/blog.joins.com/iri.jpg]] 결국 열차에 불이 붙어 다이너마이트 등의 폭탄 등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사고로 인해 이리역에는 지름 40m, 깊이 15m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고 반경 500m 이내의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기관차 본체는 폭심지로부터 700m 떨어진 민가까지 날아가버렸고 일부 파편은 직선거리가 7km나 되는 춘포면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역 주변은 큼지막한 건물조차 형체만 남아있는 정도로 대파되었다. 역에서 근무하던 철도 공무원 16명을 포함하여 59명이 사망하였고 1343명이 중상 및 경상을 입었으며 [[이재민]] 1647세대 7800여 명이 발생하였다. 이는 그때까지 발생한 폭발사고 중 피해 규모로는 최대였다. 사건 이전에 이리역 주변은 철인동으로 불렸는데 [[판자촌]]과 [[홍등가]]가 난립했으며 이리에서 오래 거주한 사람들에게 철인동을 물어보면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하지만 폭발이 사람도 건물도 모조리 휩쓸어 버려 역 주변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면서 한쪽에서는 [[재개발]]의 기회라고 속으로 환호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판자촌과 홍등가였던 만큼 이 무허가 건물들과 땅의 실소유주들은 거주민과 무관한 지주들이었다.] 사고 이후에는 [[전북대학교]] 익산캠퍼스에서 중앙시장을 경유하는 중앙로 1길 확장노선과 [[익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익산대교를 경유하는 [[익산대로]]가 건설되어 익산의 주요 간선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http://www.sotongsinmun.com/bbs/board.php?bo_table=newsall_01&wr_id=4252&page=|출처]]] 중요 시설물들도 당연히 피해를 많이 입었다. 이리역 역사(驛舍)를 비롯하여 구내의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및 구내에 정차 중이던 기관차/객화차 등 117량이 파괴되었고 선로 1650 m가 파손되었으며 주택 675채가 완파, 1288채가 반파되었다. 한편 당시 이리시 창인동에 있었던 익산군청이 폭발의 진동으로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는 피해를 입었는데 1979년 익산군청이 [[함열읍|함열]]로 신축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군청을 익산군 관내로 이전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당시 함열면과 금마면, 황등면 등이 군청 유치 경합을 벌였는데 금마면은 철도가 통과하지 않았고 황등면은 이리시와 너무 가까워서 결국 함열면이 군청을 유치하게 되었다. 또한 이 무렵에 전국의 군청 소재지가 일괄적으로 읍으로 승격되면서 군청을 유치한 함열면도 함열읍으로 승격되었다.] 철도 바로 옆에 있었던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폭발사고의 직격탄을 맞아 교사가 파괴되었고[* 비교적 피해를 덜 입었던 남성여고 구 교사는 남성여고가 남중동 구 남성고 교사로 이전된 후 이리서초등학교 교사로 변경되어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피해가 컸던 남성여중 교사는 붕괴, 균열된 부분은 철거되고 남겨진 일부분이 상가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남성여고 교사가 남성여중 교사보다 피해가 덜했던 데는 남성여중 교사가 벽돌 조적식으로 지어진 반면 남성여고 교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다는 점도 한몫했다.] 본래 이리고등학교 앞에 있던 남성고등학교의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1979년 현재의 소라산 자리로 옮기고 남겨진 자리에 남성여중과 남성여고가 임시 입주하여 소라산 신교사가 완공되는 1985년 4월까지 임시 교사로 활용되다가 이후 철거되고 그 자리에 남성맨션이 들어섰다.[* 남성맨션이 지어진 때는 훨씬 뒤인 1980년대 중반이다. 그 자리에 남아 있었던 남성여중고의 소라산 이전과 남성국민학교의 폐교 전후 시점에 있었던 일.] 폭발 지점으로부터 반경 4km 이내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지고 주변 1km 이내로 부서진 철도 레일 및 객화차의 파편이 날아들었다. 또한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시|익산군]] [[익산시/행정#s-3.7|오산면]], [[익산시/행정#s-3.14|황등면]], [[익산시/행정#s-3.4|삼기면]] 및 [[김제시|김제군]] 백구면, 공덕면 등에서도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고, 20여 km 거리인 [[군산시|군산]], [[전주시|전주]] 및 백 리(40 km) 밖 [[논산시|논산군]]에서도 폭발음이 들렸다고 한다. 사고의 확대를 막은 뒷이야기도 있다. 사고가 나던 때에 승객 600여 명이 탄 여객열차[* 탑승객 규모로 보아 특급(통일호) 또는 보급/보통(비둘기호)열차였을 것이다. 그 당시의 새마을호 1칸의 정원은 56석이며 600명을 태우려면 무려 11량으로 운행했다는 뜻인데 그 당시 그렇게 긴 새마을호를 호남선에 운행했던 적도 없을뿐더러 당시 초호화 귀족열차였던 새마을호에 600명을 태울 만큼의 수요가 호남선 지역에 있었을 리 만무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호남선 새마을호는 3~4량 편성이었다.]가 이리역 직전 역인 [[부용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이 열차가 제 시간대로 운행되었다면 사고 시각에 이미 이리역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기관사가 부용역에 진입하면서 [[통표폐색|통표(운전허가증)]] 회수에 실패[* 역에 진입할 때 통표걸이에 걸린 통표를 기관사가 직접 손으로 낚아채는 방식인데 이에 실패하면 통과역이라고 해도 열차를 멈춰세워 통표를 주으러 가야했다.]하는 바람에 부용역 통과 허가가 나지 않아 통표를 획득할 때까지 계속 멈춰있어야 했다. 사고 발생 약 5분 후 통표를 회수하여 출발이 가능해졌음을 [[무전]]으로 보고하던 중 "이리역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진입하지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본인의 실수 탓에 열차를 지연시킨 기관사는 초조해져서 "화재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진입해도 되지 않느냐"고 재차 문의했지만 이리역 측은 "상황이 심각하니 무조건 대기하라"고만 답하였다. 그러나 기관사는 통표를 얻었으니 운행을 강행하기로 하고 결국 열차를 이리 방향으로 출발시켰다. 한편 이리역 역무원 송석준은 폭발 때문에 기절했다가 간신히 의식을 되찾은 뒤 해당 열차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철로를 따라 1km를 달려가 이리역으로 진입하려던 열차를 향해 윗옷을 펄럭이며 정지 신호를 보내어 가까스로 열차를 세웠다고 한다. 이 일 때문에 송석준 역무원은 2013년 코레일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등재되었다. 또한 사고 당시 이리역 구내에 [[석유]]를 가득 실은 유조화차로 조성된 열차가 대기 중이었는데 마침 이리역 인근 모현동에 살던 기관사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열차를 신속히 이동하라는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나와 열차를 [[황등역]]으로 신속히 이동하였다. 만일 유조 열차가 구내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소이탄|그마저 폭발하면서 역 일대가 완전히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리역(현 [[익산역]])은 철도교통의 요충지[*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교차하는 역]로서 그 중요도로 말미암아 신속한 복구작업이 전개되어 사고 다음날인 11월 12일 열차 운행을 재개하였고 11월 20일에는 모든 선로의 복구를 완료했다. 대규모 폭발이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해당지역 사람들은 [[북한군]]의 공습인 줄 알고 [[서울특별시|서울]]에 사는 친지들의 안부를 걱정했다고 한다. 당시 이리에 주재하던 어느 [[기자]]는 서울 본사에 연락을 넣어 "이리는 쑥밭이다! 서울은 무사하냐?"고 외쳤고 이리 주민들 중에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들에게 전화해서 "거기도 폭격 맞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속출했다.[* 바로 1년 전에 있었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마오쩌둥]] 사망, 그리고 1977년에 출범한 [[지미 카터|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정권의 갈등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안보 불안이 가중되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리에 왔다가 사고를 당했던 하춘화도 사고 직후에 '드디어 전쟁이 터졌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파일:external/www.sotongsinmun.com/8._copy2.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